1일: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2:4)
예수님이 승천하신후, 약 120명의 사람들은 마음을 같이하여 한 곳에 모여있었습니다. 오순절 날이 되었을때에, 한 사람 한 사람 각 사람위에 성령께서 임하셨습니다.
성령충만을 받은 그들에게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담대함"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전에 모여있던 그 다락방에 숨어있지 않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세상이었지만 두렵지 않았습니다. 또한 예수 이름에 대해 침묵했던 그들이었는데, 이제 그들은 담대하게 입을 열어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알아듣도록 말입니다.
오늘 우리 모든 분들 한사람 한사람위에 성령께서 임하셔서 “담대함”을 주시기를 기도하십시오. 그동안 침묵했던 입술을 열어, 담대하게 예수 이름을 말할 수 있는 진정한 성도가 되기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2일: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3:16)
베드로와 요한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해 성전미문에 앉아있던 사람을 만났습니다. 돈을 구걸하던 그를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게 했습니다. 이는 베드로의 개인의 경건과 능력으로 그 사람을 일어나 걷게 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12절). 베드로와 그 사람이 예수이름을 믿으므로, 그 믿음안에서 예수이름이 그를 성하게 한 것입니다. 예수! 그 이름에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이름을 믿을때, 모든 사람앞에서 그 이름의 능력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교회의 모습으로 다시 일어나기 원합니다. 몇 사람의 경건과 능력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모든 이들마다 예수이름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하며, 그 믿음에 굳게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믿음안에서 예수 이름의 능력이 나타나 진정한 교회로 다시 일어서게 될 줄 믿습니다.
예수의 이름만 높여지는 교회, 그 이름앞에 무릎꿇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어떤 상황을 만나도 예수 이름을 부르시고 의지하십시오. 그리고 예수 이름으로 승리하십시오!
3일: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중략)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5:3,4절중)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 사건은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던 초대교회에 찬물을 끼얹은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시작때부터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선명하게 나타내셨습니다. 주님은 교회에 구원받는 숫자가 점점 많아지는 양적인 부흥도 기뻐하셨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고 더욱 지켜야 할 것은, 교회의 거룩임을 가르치신 사건이었습니다. 주님의 눈으로 보실때, 거룩을 잃은 교회는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모여도 교회라기보다는 친목단체 혹은 세상적인 단체들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소망한인교회는 그 시작부터 거룩과 순결을 지키기로 다짐하는 진정한 교회이어야 합니다. 교회의 거룩을 깨거나 흔드는 아나니아 부부가 되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나는 과연 교회의 거룩을 지키는지, 나로 인하여 교회의 거룩을 해치는지를 주의해야 할 줄 믿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우리가 시작하는 교회는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공동체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순결함으로 사랑하고 섬기는 진정한 교회가 되기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4일: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7:53)
스데반은 그의 마지막 설교에서 절반이상을 모세에 관하여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모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율법을 받고 전해 준 위대한 선지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요절말씀에서 보면, 모세가 전한 율법이라 하지 않고, “천사가 전한 율법”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지키지도 않으면서, 단순히 율법을 전달한 모세를 위대한 선지자로 여기는 그들의 모순적인 신앙을 지적한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도 이와 비슷한 모습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그 말씀을 지키지 않는 모순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 하지만, 그분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모순적인 모습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때때로 성령을 거스를때가 있습니다.
우리 소망한인교회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우리 삶에 최고의 권위요 최고의 기준이요 가치임을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상황속에서도 말씀대로 살려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눅11:26).
5일: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사울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잡아 믿음의 도를 포기시키려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다메섹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라 선포하고 증언하니, 다메섹에 있던 유대인들이 얼마나 당황해 했을까요? 뿐만 아니라, 그는 예루살렘에서도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고, 그리스 말을 하는 유대인들과도 토론하며 예수님을 전하니, 유대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은 적지않게 당황했던 것입니다.
사울의 삶의 모습이 주변사람들을 이렇게도 당황스럽게 했던 것은, 단 하나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눈에서 세상과 욕심의 비늘이 벗겨졌을때 비로서 예수를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남은 삶을 주를 위해 살기로 결심하는 일에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힘들고 위험한 길임을 잘 알았음에도 그는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그를 통해, 사도행전을 이끌어 가셨습니다.
우리 소망한인교회는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고 경험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과 욕심의 비늘이 벗겨지고,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망설이지 않는 교회이어야 합니다. 그런 교회, 그런 성도가 되기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6일: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11:17하반절)
베드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방인 고넬료집을 방문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고는 함께 식사를 나누고 며칠 더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 후에 베드로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고넬료집에 머물면서 함께 식사를 한 것을 문제삼고 비난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했다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은 후에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관심갖기 보다는, 여전히 이전의 종교적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었습니다. 베드로도 그들과 같은 유대인이었음에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했던 것입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우리 소망한인교회는 이전의 교회생활이 기준이 되지 아니하고, 오직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하는 교회이어야 합니다. 정말 “성령이 이끄시는 교회”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통해서 새로운 교회를 여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새로운 주님의 교회를 여실 것이라 믿습니다.
7일: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14:22)
사도바울과 바나바는 1차 전도여행을 떠납니다.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할때였습니다. 그곳에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만난 바울은, 그 사람에게 고침을 받을만한 믿음이 있음을 보고는 그를 일으켜 세웁니다. 그 기적의 사건을 본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여기고 제사를 드리려 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드 큰 기적을 보고 경험했음에도, 그들은 다른 지역에서부터 몰려온 유대인들의 선동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신처럼 떠받들던 바울을 죽이려고 돌을 던졌던 것입니다. 그 사건을 통해서 사도바울은 다시한번 깊이 깨달았습니다. 진정한 믿음의 길은 영광의 길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환난을 만나기도하고, 그리고 믿음에 굳게 서서 그 환난을 이기는 믿음의 길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요즘 몇분에게 들었습니다. 좁은 길로 가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소망한인교회와 함께 하기로 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어떤 영광을 얻고자 새로운 교회를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환난이나 어려움이 있어도, 주님을 바로 섬기고 말씀에 굳게 선 바른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 새롭게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을 굳게하여 그 믿음에 머물러 있으십시오! 심지가 견고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이사야26:3)
8일: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16:25-26)
사도바울과 실라는 아시아로 가서 복음을 전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영 곧 성령께서 그들의 계획을 막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성령님은 생각지도 못한 마케도니아 지방으로 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빌립보로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그러던 중에 그곳에서 만난 귀신들린 여종을 고쳐주게 됩니다. 그런데, 여종으로 점을 치게해서 돈을 벌었던 사람들이 수입이 끊어지자 분이 났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실라를 관리에게 끌고 가서 거짓말로 고발하고 무리들을 선동합니다. 결국 바울과 실라는 너무도 억울하게 많은 매를 맞고 깊은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럼에도 바울과 실라는 그 “한밤중”같은 현실에서도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들의 손과 발을 묶고 있던 차꼬를 풀어 주셨고, 옥문을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비슷한 경험을 하게 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기대와 다르게 우리를 새로운 길로 가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땐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인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구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하나하나 풀어주셨고, 길을 열어 주고 계십니다.
소망한인교회는 그렇게 시작합니다. 그래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이제, 변질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새로운 길을 가야 합니다. 성령께 순종할때, 풀어주시고 열어주시는 기적을 경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9일: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17:27)
바울은 아덴(아테네)에서 전도합니다. 그곳 사람들은 두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그들은 말쟁이를 좋아하고, 또한 스스로 말쟁이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저기에 모여서 서로 토론하고 논쟁하는 일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21절).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전했지만, 그들은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토론과 논쟁거리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말쟁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말쟁이들이 되어서는 아니됩니다. 토론과 논쟁으로 시간을 쓰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앞에 겸손히 그리고 두려움으로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소망한인교회는 말쟁이가 되지 말아야 할 줄 믿습니다.
두번째 특징은 그들은 종교심이 많았습니다(22절). 그래서 그들은 막연하게 잘 알지도 못하는 우상들을 자기들의 신으로 섬기며 살았습니다. 그런 신들을 잘 섬기면 자기들을 지켜줄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교심을 가지고 막연한 어떤 신을 섬기려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매일매일 더듬어 찾고 또 찾는 사람들입니다. 더욱 신실함으로 하나님을 찾고 발견하고 섬기는 소망한인교회가 되기를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온갖 마귀의 궤계에서 승리하십시오! 믿음에 굳게 서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10일: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0:24).
바울은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유대인들에 의해 붙잡히고 환난이 있을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오순절 전까지는 들어가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22-23절). 바울은 순교를 각오했던 것입니다.
그가 주님께 받은 사명은 하나님의 은혜를 증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사명을 따라 사는 것을 달리기/마라톤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마라톤을 생각해 보세요. 출발할때는 힘이 있고 잘 달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종점까지 완주하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점점 지치기도 하고 때론 힘든 순간을 만날 것입니다. 하지만 종점을 향하여 끝까지 달려야 하는 것이 마라톤입니다.
우리가 받은 사명도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과 현실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증언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 멈추지 않고 끝까지 달려야 합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그 사명을 위해서라면 자기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고, 자신이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를 증언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얼마나 귀하고 소중히 생각하며 살았는지 알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도바울의 고백은 우리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증언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서는 우리의 생명조차 아깝지 않다는 신앙적인 마음가짐,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끝까지 멈추지 않고 달려가기로 결단하는 우리 소망한인교회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 결단 가운데 혹 , 우리 안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시간 또한 가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11일: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21:13).
사도바울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체포되어 환난을 당할 것을 알았기에, 마음이 약해지는 순간에는 포기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과의 싸움이 그를 힘들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를 정말 힘들고 괴롭게 한 것은 주변 사람들의 만류였습니다.
에베소 장로들과 서로 끌어안고 울면서 헤어질때에도 그는 괴로웠을 것입니다. 또한 두로에 있던 제자들의 간곡한 만류에도 흔들렸을 것이고, 가이사랴에 있던 제자들도 눈물을 흘리면서 간곡하게 만류합니다. 가는 곳마다 바울을 사랑했던 제자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눈물로 만류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그들의 만류에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읽혀지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들의 간곡한 만류에도 예루살렘으로 향해 나아갑니다. 주님을 위하여, 주의 복음을 위하여, 그리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하여 그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갔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를 위하여 결단할때, 주의 길 좁은 길로 가기로 결단할때, 우리를 사랑하는 주변 사람들은 간곡하게 만류하기도 합니다. 때론 눈물로 호소하기도 하고 때로는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만류하기도 합니다.
그럴때 여러분은 어찌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주님을 위해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주님을 향한 온전한 헌신과 사랑을 드리기 위해서 가까운 이들의 간곡한 만류에도 흔들림없이 주의 길을 가시렵니까? 그래도 믿음의 길을 가시렵니까?
오늘 주앞에서 우리의 다짐과 결단을 드려보시기 바랍니다.
12일: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23:11)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바울은 대제사장과 유대교 자도자들앞에서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언합니다. 그들은 어떻게해서든 바울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이 사형에 처할만한 죄목을 만들어 로마총독에게 고발합니다. 무리들을 선동하여 소요를 일으켰다는 터무니없는 죄목을 씌워 고발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거짓증언까지 서슴치 않았던 영혼없는 “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뿐 아니었습니다. 바울을 죽이기전에는 먹지도 않겠다고 했던 40여명의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고발로는 바울을 죽일 수 없게 되자, 급기야는 암살까지 하려했던 것입니다. 바울 한 사람을 죽이려했던 그들의 열심은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그 열심은 하나님을 위한다 했지만, 결코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 아니었습니다. 사실은 자신들을 위한 열심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만일 교회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우리도 그와 같은 일을 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 열심은 정말로 하나님을 위한 열심일까요? 그런 교회는 어떤 모습일까요?
우리가 교회를 위하여 무언가를 하려할때, 진정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 내 욕심을 위한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진정한 교회를 향해 나아가는 소망한인교회가 되기를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13일: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로마총독은 바울을 사형에 처할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의 눈치를 보면서 판결을 미루고 있을때, 바울은 로마의 시민자로서 황제의 판결을 신청합니다.
사실 아그립바왕의 말처럼, 그는 결국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26:32). 하지만, 바울은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주님의 뜻임을 알았기에(23:11), 그는 일부러 로마황제의 판결을 신청했던 것입니다.
그는 왜 이 고난의 길을 선택했을까요? 그가 다메섹도상에서 주님께 들었던 음성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너를 택하여 사람들의 눈을 열어주어 어둠에서 빛으로 돌아오고,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며, 또 그들이 죄사함을 받아서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 사람들가운데 있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이 거룩하고 복된 일을 위하여 이렇게 결박을 당하기도 했지만 기꺼이 그런 삶을 살았던 바울은, 이제 우리를 바라보며 말합니다.
“소망한인교회 모든 분들마다 이렇게 결박당한 것 외에는 다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데이튼 지역의 모든 사람들이 복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와 죄사함을 받고 믿음으로 거룩하게 되는 구원의 은혜가 임하기를 기도해 주십시오.
14일: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힘을 내십시오).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27:25)
주께서 로마로 가야하리라 하셨지만, 로마로 가는 길은 수개월에 걸쳐 위험과 여러 어려움들이 있던 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이 가라하시는 길을 갈때에 순풍의 길을 가기도 하지만, 때론 “유라굴로”와 같은 강한 역풍을 만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럴때, 거대한 바다의 풍랑속에 작은 배를 구원하기 위해 어떤 지혜와 방법이 있을까요? 우리의 작은 지혜나 세상의 방법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만으로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소망한인교회를 시작하면서 우리 함께 다짐해 보기 원합니다. 어떤 상황과 현실앞에서도 하나님의 길을 걸으면서, 인간의 지혜나 세상의 방법이 아닌, 우리와 함께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만 바라고 믿으며 승리하기로 함께 다짐하면 좋겠습니다.
배가 파선되고 몰타섬에 표류했을때, 추위를 달래고자 나뭇가지를 주워다가 불을 피웠습니다. 그때 나뭇가지에 숨어있던 독사 한마리가 바울의 손을 물고 달려있었습니다. 현지 원주민들도 두려워했던 독사였습니다. 그래서 이젠 퉁퉁 붓고 쓰러져 죽겠구나 생각하며 기다렸지만, 바울은 죽지 않고 오히려 그 독사를 불에 툭툭 떨어 버립니다. 원주민들은 놀라고 생각을 바꾸게 됩니다.
가진 것 없이 시작된 소망한인교회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들은 어떤가요? “저러다가 좀 어려운 일을 만나면 또 흩어지겠지…” 생각할지 모릅니다.
여러분,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어려운 일을 만날때는 바울처럼 믿음으로 툭툭 털어버리십시오. 주변의 사람들이 놀라고 생각을 바꾸도록 말입니다. 우리 소망한인교회가 그렇게 믿음에 굳게 서있는 교회의 모습을 지킨다면,그것이야말로 강력한 전도가 될 것입니다.
진정한 교회, 사도행전적인 교회, 기도와 말씀으로 돌아가는 교회,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순종과 헌신하는 교회, 바른 믿음에 굳게 서 있는 교회… 그 교회가 되어 데이튼의 많은 영혼들이 주께로 돌아오도록 쓰임받는 소망한인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동안 14일간의 사도행전 묵상을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계속 성경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7월 4일부터 새벽기도회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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